드라마 ‘대왕 세종’을 오래전부터 보고 싶어했는데 이제 와서 다 봤다. 몇 가지 리뷰를 살펴보니 대체로 KBS 대하드라마 중 그래도 웰메이드 드라마 중 하나로 평가받는 드라마 같았다.아마 이 드라마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장면이 아닐까 하고세종 대왕이라는 한국에 다시 없이 군왕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당연히 그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이 드라마는 성공을 반쯤 먹고 있겠지만 이 드라마는 오히려 세종 대왕이라는 인물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더욱 인상 깊었다. 아마 이 드라마를 보신 분들 중 현재 정치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도 많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에서 세종 대왕은 너무도 애민 군주로 유명하니까, 그렇더라도 나머지 인물의 조선을 둘러싸고 격렬한 경쟁, 그리고 희생이 많은 질문을 마음 속에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걸고 그런 정책 하나, 외교 하나에 매달리나. 1.”이 나라도 사용상도 소신의 것은 아닙니다”그 대사는 태종을 왕좌에 태우고 조선의 상황을 손바닥 위에 둔 영의정 하류은이 태종에게 말하는 대사다. 처음에는 저것이 무슨 뜻이냐고 했는데 이 드라마를 다 본 후에 하류은이 무엇을 했는지 나타났다. 하류은, 민씨 형제 등 수많은 대신이 태종의 손에 파직되거나 숙청됐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죄목은 모두 비리. 비리에 대해서 그들은 또 일관되게 둘러댄다. 이 나라 때문에 제가 한 것은 얼마인데 이 정도는 내 몫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어느 정도 타당하게 보일지도 모르지 않은 말에 태종은 칼로 답했다. 하류은의 말대로 일인지 무슨 상관인 영의정에서도 신하들은 이 나라를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왕이 엄연히 존재하는 왕정 국가에서 신하가 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신하들은 이 나라를 위해서 노력하고 일하는 대신 그 대가로 나라에서 녹 녹을 받는다. 만약 다른 신하들보다 특히 성과를 낸 신하가 있으면 이를 자신이 국가에 “봉사”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정하게도 당당한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그렇게 생각하는 신하가 오히려 이 나라에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왕권을 노리고 팀 플레이를 깨는 신하들도 위험하지만 그만큼 나라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매사에 손익을 계산하는 신하도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왕이 충분한 보상을 하는 힘을 잃은 순간 그 신하는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이 나라에서 등을 돌리고 인사이기 때문이다. 태종이 집권한 시기는 아직 왕조의 기틀조차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더 경계한 것 같다. 2. 주인이 귀환이 아닌 실제 예로부터 『 대왕 세종 』에 등장하는 태종과 『 불멸의 이순신 』에 등장하는 조상을 비교하고 생각했다. 태종과 선조의 양쪽이 왕권을 위협하는 것도 있는 판단되면 유능한 신하도 뿌리치며 버렸는데, 왜 이 두 행보는 똑같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원래 이 블로그를 쓰게 된 이유도 이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두개의 차이점은 아마”우리 나라”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하는 조상을 보면 항상”짐의 나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혹은 국가에 위기가 다가올 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가 이 불편한 상황을 타개하고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전라도 바다만 자신의 것이라 생각해도 좋은 이순신이 조선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지켜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대왕 세종>속의 태종은 조선을 ” 지켜야 한다”와 매번 말하고 필요하면 힘 있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없는 웃음도 얼굴에 그리거나 심지어 가족보다 중요한 신하를 자기 손으로 끊어 버리기도 한다. 두 모두 나라가 위기 상황에서 왕 역할을 했지만 한명은 국가를 자신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명은 국가를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생각했다. 누가”진짜”이 나라의 남편일까.(왼쪽)세종 내외(오른쪽)환희를 설득하고 보면 태종의 이 드라마에서는 왕의 인간적인 모습이 정말 많이 나온다. 아마 이 드라마가 왕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정치가를 드리려고 했던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역설적으로 그들이 정말 조선의 진정한 주인였구나라고 생각한다. 곤룡 포구를 입은 태종은 누구보다도 철의 군주이지만 나라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신하를 설득하는 태종은 아주 약하다 보인다. 신하를 얻기 위해서 삼고의 마음도 마다하지 않다 왕이다. 세종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무릎의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다. 정말”나의 것”은 곤룡 우라가 아니라 이 나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왕이기 전에 나라의 주인이고 싶다 세종과 태종은 그것이 나의 것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기타의 것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체면을 지키려고 몸을 아끼고 자신의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누군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봉사는 이런 힘을 낼 수 없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이니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만은 타협하지 않는다. 물론 보상도 원치 않는다.위에서 윤회, 이수, 김·존 서울 최·혜산, 그리고 이천 이 드라마가 다른 사극과 다른 점은 이런 주인 의식을 왕실에만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윤회는 세종의 때문에 작동하지 않았다. 다만 세종과 함께 일하는 것이 제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의자도 자신의 제자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믿는 정도를 걷고 있는 청년을 믿고 응원했을 뿐이다. 킨쇼 미즈(김·존 소)도 세종을 위해서 관리들과 싸우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믿음을 그대로 적어 실천했을 뿐이다. 이천과 장 영 사실(장· 연 시루), 최 해산(최·혜산)도 세종을 위해서 과학 기술 연구에 몰두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한일 철야했을 뿐이다. 그래서 세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며 찬성하는 사람들이며 누구도 맹목적이지 않다. 어쩌면 세종의 정치는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당파 싸움이었다면, 이 정책이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올지 판단하기가 쉬웠겠지만, 모두가 마음에서 정치에 임하는 도중에는 정책마다 매번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직이나 재물 같은 것으로 설득할 리 없다. 그들이 단순히”신하”에 머물고 있다면 그렇게 설득이 가능했겠지만,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맞서는 사람들을 달콤한 속임수로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世宗の大軍時代、自分に何で国事に出るのかと尋ねた忠寧大軍に「私は朝鮮人です」と答えた輪廻。3. 그래서 남편은 외롭고 힘든남편이 자신의 것을 잘 지키려 하면 아무래도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것에 대한 더러움을 닦고 닳은 것을 고쳐서 보면 자신의 손을 더럽히거나 다치거나 하는 일도 자주 있을 것이고. 아끼는 것만큼 아마 그런 일이 많을 것이다. 물건 하나를 보관하는 것도 그렇지만, 한 나라는 어쩔 수 없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 고통을 분담하는 남편들의 모습을 잘 보인다. 주인 아니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그 아픔을 서로 공유하고 달래 준다. 그렇게 보면 이 중 누구도 함부로”잘 되겠지.”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편한 이야기는 주인이 아닌 고객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향후도 힘든 것을 알고 비록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도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옆에 있다는 말, 고생이 많다는 말 이상은 서로 말할 수 없다.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은 아무도 우위에 없는 평등한 모습이다. 스승과 제자, 아내와 남편,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전에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소유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동지들임.4. 이 나라의 진짜 주인임을 알아야 할 사람들에 본인이 주인임을 알려야 할 때, 세종은 대군 시절 처음으로 저자를 돌아다닌 뒤 내가 예상한 백성의 모습과 실제의 백성의 모습이 다른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책 속의 덕 있는 백성은 어디로 가자신의 이익 때문에 타인을 밟기를 서슴지 않고 백성만이 남아 있다. 그 자리에서 세종은 정치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태양이 왕을 상징하지만 태양 아래 나란히 선 세종과 윤회를 보면 진짜 태양은 그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지켜야 할 백성임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누구도 백성에게 이 나라가 백성의 것도 있다고 말한 적이 없어. 물론 왕과 신하는 모두 말로는 백성을 하늘과 생각하고 섬기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궁궐 담장과 사대부의 기와 담장을 뛰어넘기 어렵다. 자신의 의사를 멋대로 넓히지 못하는 사람을 남편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종 대왕은 자신과 함께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인 백성에게 그들이 이 나라의 진짜 주인임을 알린다. 백성이 정말 이 나라의 주인이 돼야 책에서 보고 있던 이웃을 존중하고 덕을 선호하는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에서 열어야 하고 그렇게”훈민정음”이 탄생한다. 5. 차마설-주인으로 행세하는 사람, 정말 주인인 사람 중·고교 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우는 몇 안 되는 고전 수필 중 하나”차마설”. 소유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 이 글을 떠올리고 잠시 인용하자.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어서, 혹시 빌려서 타는데 마르고 둔감해서 발이 느린 말이라면 비록 급한 일이 있어서도 감히 태형을 넣지 않고 조심하고 이내 쓰러질 것이라 생각, 개울이나 골에 만나면 내려서 걸어가서 후회하는 것이 적었다. 발이 크고 귀가 날카로운 준마로 잘 달리는 말에 타면 의기양양하게 채찍질하다 하면서 고삐를 놓으면 언덕과 계곡을 평지처럼 보이는 것 정말 장쾌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위험하고 떨어지는 걱정을 면치 못 했다. 아, 남의 마음이 바뀌어 바뀌는 게 이런 것인가? 남의 물건을 빌려서 하루 아침에 용도에 대비하는 것도 이런 것이니 하물며 정말 내가 갖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남이 가진 것이 아무 것도 빌리지 않은 것은 없다. 왕은 백성의 힘을 빌려서 비싸게 부귀한 지위를 갖고 신하는 왕의 권세를 빌려서 은총과 소중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버지부터 이은 삼촌에게서, 비 복은 카미도 노의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그 빌린 곳이 많고 많아 대개는 자신의 것으로 하고 끝까지 반성할 수 없으니 어떻게 미혹된 것은 아닐까? 저러다가도, 만약 잠시 동안에 그 빌린 것이 돌아오면 사방의 왕도 외톨이가 되고 백승을 갖고 있던 집도 쓸쓸해신하가 되므로, 하물며 그것보다 더 미약한 사람인가? 맹자가 칭하기엔 “남의 것을 오래 빌리라고 쓰고도 갚지 않으면 왜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없다고 알겠느냐?”라고 말했다.제가 여기에 느낀 적이 있어서 차마설을 만들어 그 의미를 넓히다.from.[네이버 지식 백과]물론 이 글의 주제는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서 빌린 것인데 자기 소유인 것처럼 행동하고 반성하지 않는 것을 비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반대로 비판할 것은 자신이 소유해야 할 것만 빌린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보고 싶다. 빈 물건 혹은 내 것이 없는 것이라면 그 것이 나에게 득이 될지에 의해서 마음이 바뀌는 행동이 바뀌어도 좋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것이 나의 것이니 버리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줄 수도 없다면, 그것이 득이 될지에 의해서 마음과 행동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좋지 않을수록 더 신경을 쓸 것이다. 주인이 주인임을 잊으면 그 물건은 방치될 것이다. 이를 정치에도 그대로 가지고 따지고 보면 나라의 주인은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거나 봉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가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관리할 의무가 있다. “누가 이 나라의 주인인가?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이 질문은 민주주의 사회인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 같다. 개개인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주인으로 자신의 공동체에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마음과 행동으로 공동체에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생각하고 봐야 할 것이다.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준<대왕 세종>은 단지 과거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사를 기반으로 현재를 반추하는 사극의 역할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WAVVE에서 볼 수 있으므로 만약 아직 보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한번은 꼭 보도록 권하고 싶군요~!사극이 좋아하는 한명으로 이런 정통 사극이 앞으로 더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긴 지금의 퓨전 사극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좋은 스승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이라는 말도 있듯이 누군가의 인생의 궤적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반추할 수 있는 정통 사극의 깊이 있는 울림이 그립네요… 그렇긴